본문 바로가기

☆ 서평/인문·종교·철학·인간관계

[책리뷰]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320x100

출처 : 네이버 책

 

어떤 행동도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정. 단순히 남을 돕는 행위도 나에게 남까지 돕는 힘과 권력이 있다는 표현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당연시 생각하고 별 의미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심리가 작용하여 있을 수 있다는 점 등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나 역시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성, 비장애인, 안정된 직장을 가진 것만으로 충분히 기득권 계층으로 내가 당연시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은 누군가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일 수 있다는 사고의 확장이 일어났다.

 

한편,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이 극히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는 사람들과의 약속으로 누구나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보장하지만 실제로 어떤 세계나 사회도 완벽한 평등을 보장하기는 힘들다. 모든 인류가 자로 잰 듯이 평등하게 태어날 수가 없다. 빌 게이츠는 세상의 불평등, 불공평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성장을 이룩해왔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고, 경쟁은 뒤처지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태생적으로 출발점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불평등을 사회 전체적으로 방관하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태생적인 출발점도 불평등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능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방향성을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생각이지 않을까? 저자 역시 마지막으로 소외되는 계층과 자신도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을 가지고 주위에 관심을 두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첫걸음이라며 책을 마친다.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 행위다.

 

누군가는 특권이란 말이 불편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이렇게 살기 힘든데 나에게 무슨 특권이 있는 거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 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전망이론은 사람들이 손실의 가능성과 이익의 가능성 가운데 손실의 가능성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손실 회피 편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기존에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이 손실로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평등을 제로섬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상대의 이익이 곧 나의 손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나는 어디에 서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는가. 내가 서 있는 땅은 기울어져 있는가 아니면 평평한가. 기울어져 있다면 나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이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보아야 한다.

 

집단을 가르는 경계는 상황에 따라 만들어지고 또 움직인다. 한국사회의 경험을 보더라도 외국인이 이 땅에 발 딛는 것에 반대하여 국민이 먼저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동시에 올림픽 경기를 위해 낯선 외국인을 국민으로 맞는다. ‘우리그들의 경계는 국적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를 우리라고 보는지 주관적인 관념에 달려 있다.

당연히도 한 개인은 동시에 여러 차원의 집단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차별을 받는 집단에 속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특권을 누리는 집단에 속하기도 한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고,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느끼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구조적 차별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워한다고 했다. 웃음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우월성 이론이라고 한다. 토머스 홉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우월성 이론에 따르면 자신의 위치에 따라 같은 장면이 웃기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내가 우월해지는 장면이라면 웃기지만, 반대로 내가 깎아 내려진다면 웃기지 않다.

 

어떤 집단을 희화화는 유머는 이런 집단 심리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왜 웃긴가?”라는 질문은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유머가 금기된 영역의 빗장을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일탈적인 행위가 유머를 통해 놀이 또는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 가벼운 대화일 뿐이므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부적절하게 여겨진다. 이렇게 금기된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에 권력에 도전하는 풍자가 가능하고, 사회는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금기의 빗장이 약자를 향해 풀렸을 때 잔혹한 놀이가 시작된다.

 

유머, 장난,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웃음을 유도하려고 할 때, 누군가는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놀려도 되는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반복된다. 우리가 누구를 밟고 웃고 있는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이유이다.

 

유머와 놀이를 가장한 비하성 표현들은 그렇게 가볍게 만드는 성질때문에 역설적으로 쉽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이런 언어 공격은 인간 내면의 아주 본질적인 부분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지만, 그 말이 왜 문제인지 설명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설명할 기회의 순간은 짧다. 우리는 대개 말문이 막힌 채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친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라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 규칙이 되려면 필요한 중요한 전제가 있다. 우선 무슨 능력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하는 평가 기준을 만들고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편향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능력을 판단하는 많은 기준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편향되어 있지 않은지 의심해봐야 한다.

능력주의 체계는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다른 손님이 오는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유색인종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텔 주인은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영업규제가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법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사유재산을 제한해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일이라는 의견이었다.

 

아마도 최근 한국 사회에서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운 가장 뜨거운 쟁점의 하나는 동성애 또는 동성결혼일 것이다. 동성애는 성경에서 죄악 행위이며 동성결혼은 창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신념과 차별금지의 원칙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진문은 인종차별의 역사, 성차별의 역사, 성 소수자 차별의 역사로 이어지며 오랜 세월 반복됐다. 경직된 위계질서와 배타성을 내재한 교리들은, 차별을 금지하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권의 대원칙과 끊임없이 부딪힌다. 역사적으로 종교적 신념이 언제나 소수자를 차별하는 방향으로 작동한 건 아니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나누는 것은 많은 종교가 지켜온 공통된 가치이다.

최소한 종교적 신념이 타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이 남성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부하가 상사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권력관계는 기존과 달라진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사장이 어떤 직원이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이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이성애자가 하는 동성애자가 싫다라는 말은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싫다라고 하는 말과 같지 않다. 마찬가지로 비장애인이 하는 장애인이 싫다라는 말은 장애인이 하는 비장애인이 싫다라는 말과 같지 않으며, 국민이 하는 난민이 싫다라는 말은 난민이 하는 국민이 싫다라는 말과 같지 않다.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주체 사이의 권력관계가 그 말의 의미와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정은 단순히 사람이라는 보편성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사람이 다양하다는 것, 즉 차이에 대한 인정을 포함한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말하는 차이의 정치는 이렇게 중립성으로 은폐된 배제와 억압의 기제에 도전하기 위해 차이를 강조한다.

평등을 위해 차이를 강조한다니, 얼핏 모순된 주장으로 보일 수 있다. 오히려 그 구분을 없애야 맞는 접근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다.

보편성이 때로 차별을 은폐하는 억압의 기제로 사용될 수 있다. 소수가 경험하는 차별이 드러나지 않게 억누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영은 억압적 의미를 가지는 차이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류 집단의 입장을 보편적으로 보면서 비주류만을 다르다고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관계적으로 이해해 상대화하는 것이다.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직시할 용기가 있는가? 차별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발언, 행동, 제도가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라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산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은밀하고 사소하며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선량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차별과 혐오의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선량한

book.naver.com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