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졌다. 옷장에서 겨울 코트를 꺼내 입었다. 문득 예전 연인이 사줬던 옷임을 깨닫고 추억에 잠겼다..가 아니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약 지금 내가 그 J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끔찍한가!
J는 넉넉한 가정에서 풍족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빠듯한 가정살림에서 자라온 나와 달랐다. J는 쇼핑을 좋아했지만, 사치스럽지는 않았다. 적당히 원하는 것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J는 이해심이 많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딱하게 생각할 줄 알았고, 베풀 줄도 알았다. 착한 부자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J는 그것을 나에게 조금씩 전수해주려 했다. 나는 부유한 사람의 생활양식을 접하며 조금씩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철부지였던 내가 조금은 세련되어졌다. 부자의 품위와 소양을 배울 수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도 그 경험의 일부가 나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J에게 고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성장하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 늘 고맙게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니 건강한 연인은 아니었다. 연인관계란 무엇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관계가 아니다. 콩깍지가 끼었든, 속았든 서로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사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애초에 우리 둘은 어울리지 않았다. 언젠가 같은 커플룩을 입었을 때, J는 잘 어울렸으나, 어딘지 어색한 내 모습을 느꼈던 그 날처럼.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짝이었던 셈이다.
어찌됐든 J와 헤어졌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나와 연애는 할 수 있으나,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는 원망했다. 지금은 그런 결정을 해줘서 오히려 감사하다. 때로는 시간이 한참 흘러야 깨닫게 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J와 함께하면서 나는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갔다. 날 것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자 했다. 배움이나 변화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목적이 없다면 자기 표현에 장애를 갖게 되거나,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린다. 현재도 배움을 추구하지만 배워서 나를 표현하려고 하며, 변화를 추구하지만 지금의 나를 잊지 않으려 한다. 비로소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살고 있음을 느낀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한, J와 함께 했던 그 세월이 고맙다.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
나는 J를 만나기 전에 고삐풀린 망아지였다. 그와 헤어지고 다시 고삐풀린 말이 되었다. 안전한 마굿간에서 주인이 주는 사료를 먹는 길들여진 말이 아님을 감사하다. 비록 천적이 도사리는 야생의 들판이지만 내 스스로 뛰어다닐 수 있는 지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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