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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기록

아내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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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싸웠다.
아니, 내가 화가 났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삐쳤다.
며칠전 오후 다급한 목소리로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식이 생겨서 밥을 먹고 온단다.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쿨했다. 퇴근 후 5시, 내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내는 집을 나섰다. 아들과 밥을 먹고 설거지 및 정리를 하는데 6시 30분쯤 전화가 왔다. 차를 마시러 가는데 가도 되느냐?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역시 쿨했다. 아내는 아들이 자기 전에는 오겠다 했다. 아들을 목욕시키고, 같이 책도 읽고, TV도 조금 보고. 어느덧 9시가 다 되어가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오고 있는 중이겠거니. 어디쯤인지 연락해볼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물어보나마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일텐데 괜히 전화해서 안달난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쿨하고 의연한 남편의 모습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쳐갔다.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9시 30분. 아들이 잘 시간이 되었다. 목욕을 너무 오래했는지 아들의 컨디션이 나빠졌다. 콧물도 훌쩍거리고 눈이 빨개졌다. 엄마를 찾으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일단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양치를 시켰다. 아내가 오면 운동을 가려 했기 때문에 세수만 하고 머리도 감지 않은채로 같이 자리에 누웠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아내 차가 주차장에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10시 30분이다. 안방으로 와 대충 잘 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들어와 묻는다. "아직 안 잤어?" 대답도 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야기 하다보니 늦었어."
"그러면 연락을 해줬어야지!"
"당신도 연락이 없길래 그냥 연락 안했지."
어이가 없다.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화가 났다. 이야기 하다보니 늦었다라니 이게 할 말인가? 먼저 사과부터 해야하는 거 아닌가? 내가 연락을 안해서 연락을 안했다라니. 뻔히 집에서 아들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내 신변을 연락해서 알려야 한다는 뜻인가? 연락은 온다는 사람이 오지 않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당신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준혁이 자기 전에 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말을 했으면 지켜야지, 지키지 못할 거라면 미안하다고 연락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더욱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미 한시간 자고 잠이 깨버린뒤라 잠이 안오는게 당연하다. 그래도 자야지.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다. 안방에서 한참동안 아내 씻는 소리가 거슬린다. 아내가 나가고 나서도 잠이 안 온다. 자꾸 억울한 생각만 들고 기분 나쁜 감정의 골만 깊어지는 것 같다. 불을 켰다. 이대로는 못 자겠다. 이대로 자면 잠을 자도 상쾌할 것 같지 않다. 어떻게든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 핸드폰을 볼까하다가 책을 읽었다. 30분 정도 읽다보니 잠이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도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어 일어났다. 감정은 많이 가라앉았다. 감사용서의 기도를 드리며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에게 감사의 기도를 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진 않았지만, 스스로를 위해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용서기도를 했다. 잠시 뒤 아내가 씻으러 들어왔다.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아직 용서를 못했나보다. 아내가 씻고 나와서 어제 화가 많이 났느냐고 물었다. 내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려 했다. 화가 많이 났다고 말했다.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아내가 미안하다고 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나를 위해 당신을 용서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직도 가슴이 답답한 것 보니 화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 미안하다고 사과를 안했거나, 아니면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나보다.

이렇게 아내에게 화가 났다. 아니, 아내에게 삐쳤다. 내가 생각하는 내 자신보다 더 속이 좁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선택이 있다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의 말도, 『상처받지 않은 영혼』의 마이클 싱어의 말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실천하기 어렵다. 화가 났다고 표현했는데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감정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더 속상하다. 행동은 쿨했는데 마음은 쿨하지 못한 것이 너무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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