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러의 심리학을 철학자와 한 청년의 대화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인간의 심리와 어려운 철학 내용이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처음 보았을 때는 ‘이런 내용도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네’ 라고 생각했다가 책을 읽어나갈수록 인간의 심리의 밑바닥을 파고드는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계속해서 밑줄을 긋게 되었다.
첫 번째 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원인론과 목적론
'불안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세. 거꾸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다시 말해 그 친구에게는 '바깥에 나갈 수 없다'라는 목적이 먼저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불안과 공포 같은 감정을 지어내는 거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목적론이라고 한다네.
원인론과 목적론은 다르네. 자네는 모든 것을 원인론에 근거해서 말하고 있어. 원인론을 맹신하면서 사는 한,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네. 그것이 목적론이지.
자네는 '화가 나서 큰소리를 낸 것'이 아닐세. 그저 '큰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 것'이지. 다시 말해 큰소리를 내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지어낸 걸세.
나는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세. 누구나 감정은 있어. 당연하지. 하지만 만약 '인간은 감정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다'라고 한다면, 그 의견은 결코 수용할 수 없네. 우리는 감정에 지배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닐세. 그리고 인간은 '감정에 지배받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또한 '과거에도 지배받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아들러 심리학은 허무주의와 대치되는 사상이자 철학이라네.
우리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간을 기계처럼 바라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임을 이해하기를 바라네.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이것이 철학자의 주장이었다. 철학자가 제기한 '목적론'은 정통적인 심리학의 인과법칙을 근본부터 뒤집는 개념이었기에 청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용기의 심리학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지금 자네가 불행한 것은 자네 손으로 '불행한 상태'를 선택했기 때문일세.
'이런 나'를 선택한 것은 자네일세. 대체 언제 선택했다는 걸까? 대략 열 살 전후라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이지.
생활양식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
'이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면 눈앞에 닥친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경험을 통해 추측할 수 있어.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인간은 변할 수 있다.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할 용기가 부족하다. 즉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불행한 것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뭘까? 바로 지금의 생활양식을 관두겠다고 결심하는 걸세. '만약 ~였더라면'이라고 하는 가능성 속에서 사는 동안에는 절대 변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변하지 않을 핑계를 만드는 셈이니까.
소설가를 꿈꾸면서 바빠서 소설 쓸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니 문학상에 응모할 여력이 없다는 친구가 있어. 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거라네.
어쨌거나 시도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네.
아들러의 목적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라고 말해주는 거지.
두 번째 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모든 고민의 시작 : 인간관계
자신의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네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라고 결심했기 때문이야. 자신을 좋아하지 않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장점을 보지 않고 단점에만 주목하는 걸세.
일단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라네. 이러한 접근 방식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무서워하지. 그런 상황에 휘말리느니 처음부터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걸세. 즉 자네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이라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어쨌든 아들러는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고 단언했으니까.
내가 내 키에 대해 느낀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인 감정이었네. 만약 비교해야 할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키가 작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아들러는 "우월성 추구도 열등감도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이다"라고 말했네. 열등감도 제대로만 발현하면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되는 거지.
열등 콤플렉스와 우월 콤플렉스
열등감 자체는 그다지 나쁜 게 아닐세. 아들러도 말했듯이 열등감은 노력과 성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가령 학력에 열등감을 느껴 "나는 학력이 낮다, 그러니 남보다 몇 배 더 노력하자"라고 결심한다면 도리어 바람직하지 않나. 하지만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킨다네. 구체적으로는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하거나 "나는 못생겨서 결혼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지.
자네가 말한 인과관계에 관해 아들러는 '무늬만 인과법칙'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네.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 설명하고 이해한다고 말이야. 며칠 전에도 "내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이혼한 탓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네. 프로이트의 원인론 관점에서 보자면 부모의 이혼은 큰 트라우마이자 그 사람의 결혼관과 밀접한 인과관계에 놓여 있지. 하지만 아들러는 목적론 입장에서 그것을 '무늬만 인과법칙'이라며 경계했네.
우월 콤플렉스라고 하지. 자기 공을 자랑하며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걸핏하면 가장 빛나던 시절의 추억담을 늘어놓는 사람. 이런 것도 우월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지. 일부러 말로 자랑하며 뽐내는 사람은 외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네. 아들러도 분명히 지적했지. "만약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열등감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열등 콤플렉스와 우월 콤플렉스는 의미는 달라도 실상 뿌리는 같다는 거지. 예로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 있네. 구체적으로는 '불행 자랑'이라고 하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 말하는 사람. 타인이 위로하거나 변화를 권하면 "너는 내 심정이 어떤지 몰라"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을 가리킨다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한 것을 '특별'하다고 여기고, 불행함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 하지.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놓고 마치 무기처럼 휘두르는 것이네. 불행을 무기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해. 자신의 불행을 통해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속박하고 지배하려 들지.
하지만 자신의 불행을 '특별'하기 위한 무기로 휘두르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네.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우월성 추구'란 자신의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디디려는 의지를 말하는 거지. 남보다 더 놓은 곳으로 가려고 경쟁하려는 의사가 아닐세.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우리는 저마다 달라. 성별, 나이, 지식, 경험, 외모까지 같은 사람은 없다네.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다는 것은 순순히 인정해. 하지만 모든 인간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존재일세. 인간은 누구나 달라. 그 '차이'를 우열과 엮으면 안 된다는 걸세. 어떤 차이가 있든 우리는 대등하니까.
내가 나로서 살려고 할 때 경쟁은 필히 방해가 된다네. 기억하게.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자네가 전에 말했지?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가 없다"라고 말이야. 그것은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한 걸세. 하지만 일단 경쟁의 도식에서 해방되면 누군가에게 이길 필요가 없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할 수 있게 되네. 그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언제든 도움의 손길을 내어줄, 믿을 수 있는 타인. 그것이 친구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고 느낄 수 있다면 세계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질 걸세.
만약 면전에서 욕을 먹었다면 그 사람이 숨겨놓은 '목적'이 뭔지 생각할 걸세. 면전에서 욕을 먹었을 뿐 아니라 상대의 언동으로 진짜로 화가 났을 때는, 상대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으로 생각하게
*권력투쟁 : 싸우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 싸워서 이기고 싶은 것. 이겨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은 것.
'참는다'라는 발상은 자네가 아직 권력투쟁에 사로잡혀있다는 증거일세.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그리고 그것이 권력투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서둘러 싸움에서 물러나게.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말게. 이것이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지. 나는 옳다, 즉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라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일세.
많은 사람이 권력투쟁에 돌입해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그러니까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곧 '패배로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라네.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아들러 심리학의 분명한 목표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 양 측면에서 아주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지. 먼저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라는 두 가지를,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과 그로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을 제시했네.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과연 그럴까? 친구와 지인의 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네. 이는 사랑의 과제와도 연결되는 내용인데, 중요한 것은 관계의 거리와 깊이라네.
자네가 변하면 주변도 달라지네.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일세. 타인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상황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닐세. 자네가 첫발을 내딛기를 기다리고 있지.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단 연인 사이나 부부관계에서는 '헤어진다'라는 선택지가 있네. 그런데 부모 자식 관계는 원칙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해. 연인이 붉은 실로 연결된 사이라고 한다면, 부모 자식은 단단한 쇠사슬로 연결된 관계일세. 게다가 손에는 작은 가위 밖에 없지.
지금 단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피하지 말라는 걸세.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뒤로 미뤄서는 안 돼. 설령 끝내 가위로 끊어내더라도 일단은 마주 볼 것. 가장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상황, '이대로'에 멈춰 서 있는 것이라네.
가령 자네가 A라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세. A의 결점을 용서 못 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에게는 'A를 싫어한다'라는 목적이 앞서고 그 목적에 맞는 결정을 나중에 찾아낸 거니까. 바로 A와의 관계를 피하기 위해서지.
사람이 어느 단계에서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라고 결심하고, 관계를 끝내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걸세. 상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네. 자신의 '목적'이 변했을 뿐이지. 사람은 그럴 마음만 있으면 상대의 결점이나 단점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이기적인 생물이네.
아들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어.
설사 자네가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고 인생의 거짓말에 의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네가 '악'에 물들어서가 아닐세. 도덕적으로 규탄받아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는 걸세.
아들러 심리학은 '소유의 심리학'이 아니라 '사용의 심리학'일세. 요컨대 '무엇이 주어지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하는 것이네.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소유의 심리학'이고 결국엔 결정론으로 귀결해. 반면 아들러 심리학은 '사용의 심리학'이고 결정은 자네가 하는 걸세.
2장을 읽고 나서부터는 많은 생각과 의문이 들기도 했다.
먼저 '내 사주에는 돈이 없어서 나는 부자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내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이 풍족하지 못한 것에 열등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다는 뜻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한다는 것도 사실은 열등감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것도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자신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임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열등감)을 감추려는 것에 불과하며 부족한 자신을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기 때문에 우월함을 통해 인정받고자 자랑하는 것이라는 이론이다. 늘 '겸손해라. 자랑하지 마라' 라고 말하는 교육에 있어 그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유를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경쟁심리는 방해가 될 수 있는지를 느꼈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진정으로 경쟁의 도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완벽하게 초연하는 것이 가능할까? 책에 나오는 철학자처럼 세상과 동떨어져 재야에서 살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목적론으로서 스스로 이유를 찾는다는 부분에서도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특정 모임에 나가기 싫어서 그 모임의 단점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울 점이 없다. 유쾌하지 않다. 만나서 내가 득이 될 게 없다. 에너지만 뺏기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은 모두 내가(나만) 가지는 문제점이라는 생각이다. 내 계산적인 것에 수지가 안 맞는다는 평가가 내린 후, 관계를 끝내자고 결심을 내리고 단점을 찾은 것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결국 해결책은 용기를 내는 것이다. 어떤 용기를 내야 할까? 청년이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달라는 요청으로 '두 번째 밤'장을 마쳤다.
세 번 째 밤.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과제의 분리
부모님 뜻에 따라 진학할 학교를 정했을 때, 자네는 부모님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나?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안도한 것도 사실이에요. 이 학교라면 드디어 인정받을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네.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도리어 인정받기를 바라서는 안 되네.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인정받기를 바란 나머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되지. 즉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라네. 기억하게. 자네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 역시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세.
자기 멋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닐세. 이를 이해하려면 아들러 심리학의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네.
아이가 공부하는가, 하지 않는가. 혹은 친구와 놀러 가는가, 가지 않는가. 원래 이것은 '아이의 과제'이지 부모의 과제가 아닐세.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일세. 거기에 대고 부모가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에, 비유하자면 흙투성이 발을 들이미는 행위일세. 그러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분리해서 타인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뿐일세.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 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네.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가 급격히 달라질 걸세.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약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결과-이를테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지망하는 학교에 불합격하는 등-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야. 아이란 말이지. 즉 공부는 아이의 과제일세.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네.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를 권하는 게 아닐세. 방임이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라네.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는 걸세.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하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결국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가령 아이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 나는 '이것은 아이의 과제'라고 생각하네.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에 대해 개입하려 들지 않고, 과도하게 관심을 두고 살피는 것을 그만둘 걸세. 그런 다음 곤경에 처했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낼 거야. 그러면 부모의 변화를 눈치챈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신의 과제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만약 인생에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 그 고민은 인간관계에 있으니- 먼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라고 경계선을 정하게. 그리고 타인의 과제는 버리게.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만드는 첫걸음일세.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지.
적당한 거리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야. 오히려 입구라고 할 수 있지.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상대와 마주 보고 얘기조차 할 수 없네. 그렇다고 거리가 너무 멀어서도 안 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네.
자네는 방금 전 과제의 분리가 상대의 호의를 짓밟는 것이라고 말했네. 그것은 전적으로 '보상'에 얽매인 발상이네. 타인에게 뭔가를 받으면 거기에 -설사 그것이 바란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보답해야 한다는. 이는 호의에 답한다기보다는 보상에 연연하는 것뿐일세. 상대가 내게 어떻게 행동하든 내 행동을 정하는 것은 나일세.
인간관계를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가 이만큼 줬으니까 너도 이만큼 줘, 라고 바라게 되네. 물론 그건 과제의 분리와는 동떨어진 발상이지. 우리는 보상을 바라서도 안 되고, 거기에 연연해서도 안 되네.
그런데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 편한 순간이 있지. 아이가 신발 끈을 잘 묶지 못하면 바쁜 엄마가 보기에는 아이가 묶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자신이 묶어주는 편이 훨씬 빨라. 하지만 그건 아이의 과제를 빼앗는 거야. 완전한 개입이지. 그리고 그러한 개입이 되풀이되면 아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인생의 과제를 직시할 용기를 잃게 돼. 아들러는 말했네. "곤경에 직면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과제를 분리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야.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지.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진로와 배우자감까지 간섭한다, 이게 자기중심적인 게 아니면 뭔가?
자기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타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며 충동일세. 칸트는 그러한 욕망을 가리켜 '경향성'이라고 했지. 본능적인, 충동적인 욕망이라는 뜻일세. 그런 경향성에 이끌린 채, 다시 말해 욕망이나 충동에 이끌려 사는 것,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돌멩이처럼 사는 것이 '자유'일까? 그렇지 않지. 그런 삶은 욕망과 충동의 노예가 될 뿐이라네. 진정한 자유란 굴러 내려가는 자신을 아래에서 밀어 올려주는 태도가 아닐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라고 주장하지. 결국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은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자유를 행사하려면 대가가 뒤따르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어.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제 뜻대로 살 수 없어.
미움받을 용기
이 말은 남에게 미움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일세.
부모에게 미움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도, 독선적으로 행동하라는 것도 아닐세. 그저 과제를 분리하라는 거지.
자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네의 과제가 아니야. 역으로 "내가 이렇게 애를 썼으니 나를 좋아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의 과제에 개입하는 보상적 발상이라네.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야.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야.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고.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물론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가는 '노력은 할 걸세. 하지만 거기서 물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지.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아이에게 그렇지 행동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되었다. 신발을 신는 것, 밥을 먹는 것은 아이의 과제인데 놓질 못한 것이다. 조금씩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기회를 주고 기다려야 한다. 아이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조금씩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제를 분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아무렇게나 살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느꼈다. ‘진인사대천명’ ,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일에는 미련을 갖지 말라는 말 등과 일맥상통한다. 아들러는 인간관계가 모든 고민의 시작이므로 인간관계에 있어 과제를 분리하고 최선을 다하고 타인의 과제는 그대로 두는 것이 인생을 고민, 괴로움, 고통 없이 사는 방법임을 알려주는 것 같다.
네 번째 밤.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공동체 감각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밀착되어 있으면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도 곤란하다. 과제의 분리는 타인을 밀어내는 발상이 아닐세.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개념이지.
만약 타인이 친구라고 한다면, 그리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가 '있을 곳'을 찾게 돼. 나아가서는 친구들-즉 공동체-을 위해 공헌하는 것도 고려하게 되겠지. 이렇게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일세.
아들러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와 인류 등을 포괄한 전체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축 나아가서는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공동체에 포함된다고 했네. 다시 말해 '공동체'라고 했을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존의 범위뿐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 그리고 우주 전체를 아우른, 글자 그대로 '만물'을 공동체라고 역설한 걸세.
사회의 최소 단위는 '나와 너'일세. 두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사회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탄생하네. '나와 너'를 기준점으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는 것일세.
과제의 분리를 하지 못하고 타인의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 나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자기중심적일세.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네.
자네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공동체의 일부이지 중심이 아닐세.
일, 교우, 사랑이라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만약 자네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에 공헌하겠다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걸세.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하는 길일세.
무언가를 주어야 내가 있을 곳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네.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학교라고 해서 학교라는 공동체의 상식으로 사리 판단을 하지 말고, 더 큰 공동체의 상식을 따르라는 거지. 가령 자네 학교에서는 교사가 절대적인 권력자라고 하세나. 그런데 그런 권력이나 권위는 학교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만 통용되는 상식에 불과하지. '인간 사회'라는 공동체로 생각하면 자네도 교사도 대등한 인간일 뿐이야. 교사가 부당한 요구를 한다면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해도 상관없네.
이는 '나와 너'의 관계에도 해당되는데, 만약 자네가 이의를 제기해서 무너질 정도의 관계라면 그런 관계는 없느니만 못하네. 이쪽에서 끊어버리면 그만이지.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야.
공동체 감각을 갖되 자유를 택하라.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게. 나보다 '나와 너',
‘다양한 사람들'보다 더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하네.
칭찬은 금물 : 수평적인 인간관계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에서 양육을 비롯한 타인과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칭찬은 금물이다.'라는 입장을 취한다네. 물론 체벌은 당연히 금지고, 야단치는 것도 인정하지 않네. 칭찬도 금물이고, 야단도 금물이네. 그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일세.
칭찬한다는 행위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지. "장하다, 잘했다. 훌륭하다"라고 칭찬하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무의식중에 상하관계를 만들려는 걸세. 인간이 남을 칭찬할 때 그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뒤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라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없지.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다고 바라는 것.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바라본다는 증거일세. 자네가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은 수직관계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세.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네.
아픈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럴 때는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네.
개입이란 타인의 과제에 불쑥 끼어들어 "공부해"라고 지시하는 것을 뜻하네. 반면에 지원이란 과제의 분리와 수평관계를 전제로 하지. 공부는 아이의 관제라는 것을 이해한 상태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거지. 공부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거라네.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인간은 칭찬을 받을수록 '나는 능력이 없다'라는 신념을 갖게 된다네. 만약 자네가 칭찬을 받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나는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네. 칭찬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이기 때문이지.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은 타인의 가치관에 맞춰 삶을 선택하게 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네.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일세. 만약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사나 존경, 기쁨의 인사 같은 더 순수한 말이 나오겠지.
칭찬받는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걸세. 반면 '고맙다'라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보다 순수한 감사의 인사라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라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지. 타인이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걸세. 존재의 차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네. 그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야.
수직관계를 맺느냐, 수평관계를 맺느냐. 그것은 생활양식의 문제이고, 인간은 자신의 생활양식을 상황에 따라 이리 바꿨다가 저리 바꿨다 할 만큼 임기응변에 능한 존재가 아닐세. 어느 한쪽만 고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만약 자네가 한 사람이라도 수직관계를 맺고 있다면, 자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파악하고 있는 걸세.
분명히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은 중요하지. 누구에게나 친구처럼, 허물없이 행동하라는 게 아닐세. 의식상에서 대등할 것, 그리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지.
윗사람이란 뭐지? 뭐가 버릇없는 의견이란 말인가? 그 자리의 분위기를 보고 수직관계에 종속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무책임한 행동이네.
과제를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임한다는 뜻인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공헌하겠다는 의미에서. 경계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사는 것과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그러나 과제를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서로 상반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순수하게 공헌하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해야 소속감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이자 가장 평가가 갈리는 이론이 공동체 감각이라고 한다.
어떤 모임에서도 생각이 다르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 인간관계는 갈등으로 과정을 통해 성숙해진다고 이 책의 처음 부분에도 나온다.
다섯 번째 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아들러의 심리학의 관점에서 '신뢰'란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걸세.
신뢰의 반대는 '회의'라네. 남을 의심하고 친구를 의심하고 살고 있다는 뜻이다. 자네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상대방은 바로 알아채지.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네.
내가 무조건 신뢰해봤자 배신당하지 않을까? 걱정할 수 있지만 배신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네가 아니야. 그것은 타인의 과제지. 자네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네. 상대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도 주겠다는 건 담보나 조건이 달린 신용관계에 불과해.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아닐세. 조건 없는 신뢰란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한, 수평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만약 자네가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면 단칼에 끊어버려도 상관없네. 끊느냔 마느냐는 자네의 과제니까.
먼저 교환 불가능한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것이 자기수용이라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조건 없이 신뢰하는 것이 타자신뢰고.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공동체 감각이란 자기수용과 타자신뢰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세 번째 키워드, '타자공헌'이 필요하다네. 친구인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 공헌하려는 것. 그것이 타자공헌일세.
타자공헌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니라네. 오히려 아들러는 타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며 경종을 울리기도 했지.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아들러 심리학이 제시한 목표>
행동의 목표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위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길을 잃어도 좋고 헤매어도 좋아. 수직관계에 종속되지 말고,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 말고, 자유롭게 앞으로 나가게.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네. 이런 현실에 대해 아들러는 간단하게 대답했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고.
"행복이란 공헌감이다"이게 행복의 정의라네. 행위의 차원에서든 존재의 차원에서든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즉 공헌감이 필요하지.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라면 결국 남이 의도한 대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지.
인생은 찰나의 연속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선'으로 파악하지. 인생을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이자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는 사고방식일세.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은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으로 생각하네.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라네.
위대한 성과를 낸 사람들은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았던 건 아닐까?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꾼 사람은 늘, 당장 연습해야 할 악보를 보면서 한 곡, 한 소절, 한 음에만 집중했을지 모르지.
춤을 출 때는 춤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춤을 추면서 어디론가 가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 그래도 춤춘 결과 어딘가에 도달은 하겠지. 하지만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아.
달리 말하면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 할까.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했네.
자유를 선택하려고 할 때 인간이 헤매는 것은 당연하네.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길잡이 별'이라는 것을 제시했지. 그 별은 타자공헌에 있네
자네가 어떻나 찰나를 보내더라도, 설령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자유롭게 살면 되네.
나는 최근에 경제적 자유를 이루려는 이유에 대해 아내와 공유한 적이 있다. 공헌보다는 성장 자유를 위해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자 했다. 아직은 공헌감은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경제적 자유인들을 보면 공헌감이 최종 목적지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인간관계의 방향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아직 아들러 심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더 반복해서 봐야 그나마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천까지는 아직 멀어보이지만 작은 것부터 실천해나가야 겠다.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내게는 능력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내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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